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린도전서 14장 20-22절『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다 백성들이 형편없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배척했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젓 뗀 아기들이나 가르치라며 조롱했다. 이사야는 농부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문적으로 깊지도 않고, 세상의 물정도 잘 모르는 농부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땅을 어떻게 기경해야 하는지도 알고, 여러 씨앗을 어디에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도 알고, 추수하는 방법을 달리하여 거둘 줄도 아는데, 유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오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믿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지도자들의 영적으로 우매함을 지적하고 있다. 나라를 망하는 길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 농부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들이 삶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던 것이다.
이사야 28장 11절에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백성의 영적 이해의 깊이는 슬프게도 얄팍하고 미성숙해졌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의 이해의 수준에 맞춰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분은 28장 10절에서 동요같이 들리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앗수르인들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피정복민의 공포에 대해서 상상해보면 이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다. 그리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 그룹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았다. 주님께서 방언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였으며, 십자가에서 육은 죽었지만, 영적으로 부활하여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방인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과 부활하심을 믿게 하신 것이다.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 외국어가 되어버리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므로 제대로 전해져야 함을 말해준다. 처음 접하는 이방인이 복음을 들을 때, 정확하게 전해야 하는데, 방언처럼 전혀 다른 의미의 복음을 전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통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통역자는 하나님의 곳간을 맡은 서기관이다.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이 증인이 되어주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 성도에게는 방언이 필요가 없다. 복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빙빙 둘려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이해하고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교회신도들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히브리어 외에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가바도기아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서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반응이 두가지인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의 출신들인데, 어떻게 이런 외국의 말들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이 제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보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술취했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횡설수설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말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이며,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당시에는 정말 술취한 자로 취급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주었다.『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베드로가 설교할 때 요엘 선지자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말을 했다.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신도들이 오늘날 방언을 무슨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참 우스운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오이코도메이)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자기의 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보고 믿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신앙이 굳건해지므로 개인의 덕으로 돌아간다. 덕이라고 번역된 오이코도메이는 교화되다 라는 의미다. 그리고 교회의 덕에서 덕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성도의 심령 속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간 자들은 방언이 아니라 감추어진 예언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알려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 속에서 드러난 계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심령 속으로 들어올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말한 것의 핵심은 여러 나라의 언어인 방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방언을 통해서 특별한 관심을 유도하고, 요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을 전하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큰 일에 관한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
방언과 예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에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방언 등 특별한 이적을 통해서 신앙심이 생기면 그 때는 예언을 하는 것이다. 예언은 믿는 자에게 하는 복음인 것이다. 오늘날 “라라라라” 라고 자칭 방언하는 자들을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이 과연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을 자가 있을까 싶다. 오히려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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