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도행전 26 18절『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 중이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땅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그립바 왕에게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이 자기에게 말한 것을 설명했다. 첫번째가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성경을 알고 있지만 사울처럼 소경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눈을 뜬 자인지 알아야만 한다. 두번째,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져야만 한다. 눈이 뜨지면 어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게 회개와 거듭남이다. 이렇게 회개와 거듭날 때 죄사함을 얻게된다.

많은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거듭남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물과 성령을 따로 생각한다. 물 세례와 성령세례를 따로 생각하는 잘못을 한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세례요한의 세례를 생각하여, 죄를 씻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죄를 씻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아 거듭난다고 생각한다.

물은 베드로전서 3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향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다. 물은 곧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옛사람이 장사되는 것이다. 로마서 63-4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물세례를 죄씻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서 장사의 과정을 생략하는 잘못을 하게된다.

구약시대 천국의 모형인 성전에 들어가면 첫번째 만나는 것이 놋제단이다. 금은 신성을 나타내고, 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낸다. 성전 마당에는 놋으로 만들었다. 놋제단 물두멍이 다 놋으로 만들었다. 그 곳은 죽음 밖에 없다. 첫번째 주님이 요구하는 것이 죽음이다. 죄인 때문에 어린양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일 제물에 죄인이 안수한다. 구원의 시작은 죄인과 제물이 서로 하나를 이룬다. 그렇게 되어야 죄가 전가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구원은 죄인과 십자가의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여기까지가 회개다.

십자가의 예수와 연합되어서 죄인이 죽은 것이다. 죽은 예수이기도 하지만, 죄인의 죽음이기도 한 것이다. 구약에서 죄인과 연합된 죽은 어린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이 그 죄인을 용서해주신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될 때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것처럼, 예수와 함께 죽은 죄인을 예수님의 부활생명으로 살리시고 의롭다 칭해주시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살리신 후에 죄를 사하심을 받는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하므로, 여전히 죄가 있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예수믿으면 단순히 죄사함을 받는다』는 논리로 말하고 받아들임으로 모두가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회개하지 않는 자가 영접기도로 구원받는 식으로 말한다면 미혹이다. 내적인 생명의 변화가 없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내적 생명의 변화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게 세례다. 눈이 뜨져야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눈이 뜨져야『자신이 옛사람이구나』를 깨닫게 되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주님이 욥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셨다. 욥은 주님께 예배를 철저하게 드린 인물이다. 예배를 드린다고 내적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내적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내가 옛사람이구나』를 깨닫고 예수와 십자가에서 죽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리에는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그곳이 회개하는 자리다. 그 곳이 주만 바라보는 자리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반드시 만나 주신다. 욥이『내가 전에는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벧엘에서 하늘로 부터 사다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주님을 보지 못했다. 라반 집에서 20년을 고생한 후 주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야곱아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그러나 야곱은 듣기만 하였다. 그런데 형 에서가 두려워서 얍복강을 건너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소경이었다. 주님은 회개하도록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회개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낮아지고 부숴지는 것이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눈이 뜨지게 되면『내가 어둠에 있구나』를 알게된다. 욥이『봄으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어둠에 있는 것은 사단에 붙잡힌 존재다. 욥처럼 예배 잘 드리고, 칭찬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도 어둠에 있다면 소경이라는 말이다. 사단에게 속은 것이다. 사단은 자기 의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야곱은 부숴지기 전에는 자기 소유를 생각했다. 그러나 부숴진 후에는 내가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소경, 왜 소경인가? 그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다. 자기 의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부인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자기가 믿는다면 자기 의에 빠진 자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은 죽은 예수와 연합된 된 자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다. 객관적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믿음이다. 둘이 하나가 되려면 하나를 버려야만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려면 누가 버려야되는가? 당연히 인간이 자기를 버려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버렸다. 이제 죄인이 자기를 버려야만 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버려야만 한다.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자를 세상에서 허약하고, 세상에서 무능한 자가 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눈을 감고 영적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다. 이게 은혜다. 그럴 때『주만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내가 죽을 자구나』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것이다. 이럴 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 2000년 전의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를 부인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 속에 살아있던 마귀를 복속하는 하며, 마귀가 유도하는 세상 사랑하는 탐심도 함께 복속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속하시는 것이다.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는 그 복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복속이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죽을 자고, 장차 죽을 자라는 것을 깨달아질 때, 예수와 함께 죽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언덕으로 인도하신다. 이 놀라운 은혜는 아무나 주시지 않으신다. 회개하고 눈이 뜨져야만 이런 은혜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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