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행전 15장 23-24절『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고이스)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에타락산) 마음(프쉬카스)을 혼란하게 한다(아나스케우아존테스) 하기로』


로고이스는 말씀, 논제, 주제 등의 의미가 있다. 관사 호가 없으면 일반적인 말씀이나, 호 로고스는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타락산은 교란, 선동이라는 의미인데, 무슨 말로 선동하고 있는가? 헬라어 성경은 두 종류가 있는데, 스테파누스 성경에는 (레곤테스 페리템네스다이 카이 테레인 톤 노몬 λεγοντες περιτεμνεσθαι και τηρειν τον νομον)이라는 문장이 있지만, 넷슬 알란드 성경은 없다. 그래서 넷슬 알란드 성경을 번역한 niv도 없으며, niv를 번역한 개역개정도 없는 것이다. 번역하면, “너희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프쉬카스)을 혼란하게 한다(아나스케우아존테스)는 문장은 생명을 뒤엎게 만든다는 것이다. 프쉬카스(ψυχὰς)는 부활생명이며, 아나스케우아존테스는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 라는 의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부활생명을 얻게 하는 것인데,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25-26절『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

헬라어성경(넷슬 알란드)에는 15장 25절과 26절의 성경이 나뉘어져 있는데, 개역개정은 25-26절의 내용을 25절에 합하여 번역했고, 26절은 ( )로 처리했다.


원래의 헬라어 성경 15장 25절은 ἔδοξεν ἡμῖν γενομένοις ὁμοθυμαδὸν ἐκλεξαμένοις ἄνδρας πέμψαι πρὸς ὑμᾶς σὺν τοῖς ἀγαπητοῖς ἡμῶν Βαρναβᾷ καὶ Παύλῳ

이를 다시 번역하면,『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마음으로 모여서 우리를 아가페 사랑으로 대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택한 사람들을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느니라.』함께 택한 자가 바로 유다와 실라이다.

15장 26절은 ἀνθρώποις παραδεδωκόσιν τὰς ψυχὰς αὐτῶν ὑπὲρ τοῦ ὀνόματο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사도행전 15장 27절『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반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고보의 선언이 있자 자신들의 주장을 꺾는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 두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신뢰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남을 인도했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녀야 했다. 바나바와 바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서명한 편지의 보증인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할 편도여행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묵묵히 순종했다. 실라는 마가 요한이 가기 무서워 이탈했던 험준한 산맥을 향해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유대 율법주의가 얼마나 방해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 6-8절『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다른 복음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말한다.『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헬라어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이다.


의롭다함을 입는 것은 영적 자아이고, 육적 자아는 율법에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서『내(육적 자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영적 자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사르키)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투 히우)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사르키는 죽어야 할 육신(육의 몸)이다. 만져지는 몸(body)이 아니라, 육적 자아를 의미하는 육의 몸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fresh로 표현되었다.


헬라어 사르키는 종교심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육의 몸(죄의 몸)이라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도 바로 육의 몸이다. 그러나, 육적 자아는 여전히 살고 있다는 말이다. 죽었다는 말은 정체성이 육적 자아에서 영적 정체성으로 바뀌는데, 육체가 있으므로 계속 육적 자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지금 내가 육신(육의 몸) 가운데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로부터 나오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부활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이다. 육적 자아인 나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믿음이 되어 영적 자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요리문답 문 73.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가? 답.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함은 믿음에 항상 동반하는 다른 은혜 때문도 아니고 믿음의 열매인 선행 때문도 아니며 믿음의 은혜, 혹은 다른 어떤 행위가 그에게 의로 돌려져서도 아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받아 적용하는 방편일 뿐이다.


교리에 의하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받아 적용하는 방편이다라고 했는데,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다가가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며, 나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믿음이 오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아래 있는 자가 된다.


갈라디아서 3장22- 23절에서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은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부터 나오는 약속이다.


사도행전 15장 23-24절『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고이스)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에타락산) 마음(프쉬카스)을 혼란하게 한다(아나스케우아존테스) 하기로』


로고이스는 말씀, 논제, 주제 등의 의미가 있다. 관사 호가 없으면 일반적인 말씀이나, 호 로고스는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타락산은 교란, 선동이라는 의미인데, 무슨 말로 선동하고 있는가? 헬라어 성경은 두 종류가 있는데, 스테파누스 성경에는 (레곤테스 페리템네스다이 카이 테레인 톤 노몬 λεγοντες περιτεμνεσθαι και τηρειν τον νομον)이라는 문장이 있지만, 넷슬 알란드 성경은 없다. 그래서 넷슬 알란드 성경을 번역한 niv도 없으며, niv를 번역한 개역개정도 없는 것이다. 번역하면, “너희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프쉬카스)을 혼란하게 한다(아나스케우아존테스)는 문장은 생명을 뒤엎게 만든다는 것이다. 프쉬카스(ψυχὰς)는 부활생명이며, 아나스케우아존테스는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 라는 의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부활생명을 얻게 하는 것인데,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25-26절『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

헬라어성경(넷슬 알란드)에는 15장 25절과 26절의 성경이 나뉘어져 있는데, 개역개정은 25-26절의 내용을 25절에 합하여 번역했고, 26절은 ( )로 처리했다.


원래의 헬라어 성경 15장 25절은 ἔδοξεν ἡμῖν γενομένοις ὁμοθυμαδὸν ἐκλεξαμένοις ἄνδρας πέμψαι πρὸς ὑμᾶς σὺν τοῖς ἀγαπητοῖς ἡμῶν Βαρναβᾷ καὶ Παύλῳ

이를 다시 번역하면,『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마음으로 모여서 우리를 아가페 사랑으로 대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택한 사람들을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느니라.』함께 택한 자가 바로 유다와 실라이다.

15장 26절은 ἀνθρώποις παραδεδωκόσιν τὰς ψυχὰς αὐτῶν ὑπὲρ τοῦ ὀνόματο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사도행전 15장 27절『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반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고보의 선언이 있자 자신들의 주장을 꺾는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 두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신뢰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남을 인도했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녀야 했다. 바나바와 바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서명한 편지의 보증인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할 편도여행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묵묵히 순종했다. 실라는 마가 요한이 가기 무서워 이탈했던 험준한 산맥을 향해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유대 율법주의가 얼마나 방해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 6-8절『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다른 복음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말한다.『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헬라어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이다.


의롭다함을 입는 것은 영적 자아이고, 육적 자아는 율법에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서『내(육적 자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영적 자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사르키)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투 히우)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사르키는 죽어야 할 육신(육의 몸)이다. 만져지는 몸(body)이 아니라, 육적 자아를 의미하는 육의 몸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fresh로 표현되었다.


헬라어 사르키는 종교심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육의 몸(죄의 몸)이라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도 바로 육의 몸이다. 그러나, 육적 자아는 여전히 살고 있다는 말이다. 죽었다는 말은 정체성이 육적 자아에서 영적 정체성으로 바뀌는데, 육체가 있으므로 계속 육적 자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지금 내가 육신(육의 몸) 가운데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로부터 나오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부활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이다. 육적 자아인 나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믿음이 되어 영적 자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요리문답 문 73.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가? 답.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함은 믿음에 항상 동반하는 다른 은혜 때문도 아니고 믿음의 열매인 선행 때문도 아니며 믿음의 은혜, 혹은 다른 어떤 행위가 그에게 의로 돌려져서도 아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받아 적용하는 방편일 뿐이다.


교리에 의하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받아 적용하는 방편이다라고 했는데,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다가가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며, 나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믿음이 오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아래 있는 자가 된다.


갈라디아서 3장22- 23절에서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은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부터 나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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