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사도행전
24장 22-23절『벨릭스가 이 도(호두)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두 사람의 주장을 들은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하고,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지키되,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지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였다.
호두는 길(way)이다. 길을 한자어로 말하면 도이다. 도라는 의미는 종교적인 신앙사상에 대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이 된다. 벨릭스가 이 기독교의 신앙사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일이 지나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 듣고자 했을 때, 아마도 벨릭스와 그
아내는 자신들에게 평안을 줄 만한 얘기를 듣고 싶어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불의하며
탐욕으로 가득찬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용기 있게 강론을 했고, 이로 인해 벨릭스는
두려워했다고 했다.
사도행전
24장 27절『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는 기독교의
신앙 사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탐욕으로 인해서 바울을 구속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사람을 의식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의 마음으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 사람들의 대부분은 무조건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믿기로 작정을 했다라도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삶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이다. 믿음과 행동의 변화는 항상 붙어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항상 붙어 있드시 믿음과 행동의 변화도 그런 것이다. 신도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도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다면, 부활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도가
부활생명을 얻어서 새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상에 대해서 죽었는가라는 말이다. 새 피조물은 비록
육체(body)는 세상에 있지만, 육의 몸(fresh)은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육의 몸은 육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육의 마음이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면, 육의 몸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이다.
육의 몸이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성도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음을 의미하는데, 죽지 않으므로 십자가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신도가 세상에 대해서 못박이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으므로, 부활생명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지 않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나가는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과 같은 것이다. 세상은 죄의 그물과 같은 것인데,
다시 그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다시 율법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2-23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의 헬라어는 “헤 에팡겔리아 예수 그리스도투(ἡ ἐπαγγελία ἐκ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이다.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부터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동격이
된다.
영어 번역은 kjv의
경우는 the promise by faith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약속), niv는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진 약속). 이 영어 번역을 다시
한다면, the promise from faith Jesus Christ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전에는 이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율법 속에
갇혀있는 자가 된다. 그래서 세상으로 부터 자유함을 입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므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왜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가 하면, 대부분 목사들과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있으며,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로만
죽었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들은 허망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진리의 길(호두)에서 벗어난 것이다.
신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면, 죄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2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신도들이 죄에 대해서 죽지 않았으므로, 날마다 죄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신도가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므로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가 되며, 그래서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신도가 사탄의 종이면, 그에게 교회 공동체의 십자가는 무덤이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부활의 영광을 안고 살아가는 곳이지만, 무덤이 된 곳은 교회 공동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복신앙에 물든 대부분 교회 건물은 모습만 화려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곳이다. 서양의 무덤을 보면 겉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관광객들이 구경하러
갈 정도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죽은 자의 뼈만 있을 뿐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말한, 뼈가 살아 움직이려면 부활생명이 필요하고, 부활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권력과 명예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생명을 전하러 다닌 것이다. 부활생명이 없는 교회 공동체는 허망한 것을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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