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린도후서 5장 5-8절『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아르라보나)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다르룬테스) 몸(소마티)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디아 피스테오스)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다르루멘) 원하는(유도쿠멘) 바는 차라리 몸(소마토스)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아르라보나(ἀρραβῶνα)는 보증금이다. 죄의 몸 위에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덧입는 것이 구원인데,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방법은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죄의 몸이 그리스도의 옷으로 덮혀지는 것이다.
다르룬테스(Θαρροῦντες)는 용기있다는 표현이다. 그 용기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용기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신도 스스로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소마티(σώματι)는 육의 몸이다. 육의 몸으로 있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어서 하나님께 나가라는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몸이다. 임마누엘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호 로고스께서 임재하심을 믿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보증으로 받아야만 한다.
디아 피스테오스(διὰ πίστεως)는 믿음을 통하여 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믿음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믿음으로 주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이다.
다르루멘(θαρροῦμεν)은 용기가 있다는 표현이다. 유도쿠멘(εὐδοκοῦμεν)은 기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소마토스(σώματος) 는 육의 몸이다.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표현해보면, 우리가 용기를 내어 육의 몸을 벗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엔데문테스) 떠나든지(엨데문테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소마토스σώματος)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엔데문테스(ἐνδημοῦντες)는 주님과 함께 있든지 라는 표현이고, 엨데문테스(ἐκδημοῦντες)는 죄의 몸으로부터 떠나든지 라는 표현이다.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에 가 본적이 있었는데, 그가 몸 밖으로 나간 것인지, 몸 안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거듭나서 열매를 맺는 일이다. 열매는 심령 속에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새성전이 세워지고, 예수님이 재림하여 그 성전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육의 몸으로 사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은 자는 이미 둘째 사망에 처해졌으므로, 영의 몸을 입고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성령이 보증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심판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 경우 서로 소통하게 되지만, 한 사람만 성령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닐 경우,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마음으로 자랑한다.
성령의 사람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도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들린 사람은 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성령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이 이끌고 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카이네) 피조물(크티시스)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ὴ κτίσις)는 하늘로 부터 태어난 자를 의미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부활과 거듭남은 같은 개념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고, 모든 거듭난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므로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적을 그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한 아들로 인증받으셨으며,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였으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셔서 장사되었으며, 사흘만에 죽은 몸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같이 이루어짐을 성도는 믿는 것이다. 이전의 피조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하늘로부터 태어난 피조물로 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이었다. 바울은 그 소망으로 인하여서 큰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과 겸손함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고백했다. 자기가 그처럼 희생적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육신을 따라 아는 사람들,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 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저주받은 모습으로 죽은 실패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다윗과 솔로몬처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온 세계를 그 앞에 굴복시키는 메시아였다. 그런데 메시아가 나타났는데 기대했던 위대함이라고 없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었다. 육신을 따라서 외모의 뛰어남을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육신의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강권함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고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육신을 따라 아는 대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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