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 1-2절『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쉬네르군테스)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파라칼루멘) 하나님의 은혜(텐 카린 투 데우)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카이로)에 너에게 듣고(에페쿠사πκουσ)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에보에데사)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쉬네르군테스(Συνεργοντες)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다. 파라칼루멘(παρακαλομεν)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권면을 의미한다. 텐 카린 투 데우(τν χριν το θεο)는 하나님의 그 은혜다. 그 은혜는 성령의 사역자로서, 말씀의 사역자로서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헬라어의 때는 카이로(καιρ하나님의 시간)와 크로노스(물리적인 시간)가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그 때는 하나님이 순간 정하신다는 것이다. 이르시되 라는 말은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을 요약 인용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안에 함께 가신다고 하셨다. 성막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사람들의 심령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므로 함께 가시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거하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하나님의 영광이 우상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택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고 명하셨다. 장신구를 떼어 내라는 것은 그것들이 우상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 우상 만들 여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이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에게 장신구는 애굽과의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이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사막을 걷고 있음에도 장신구를 달고 다니던 그들의 모습은, 배고프다 힘들다 말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허영과 위선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만을 원하셨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장신구는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게 하며, 머물게하는 우상이 된다.

하나님은 백성에 대해서 좋게 여기지 않는데,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백성이신데,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얼굴이 너와 함께 갈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하는 것이 얼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굴이다. 하나님은 얼굴로 함께 가겠다고 하는데, 모세는 분명히 은혜 입은 것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내 얼굴(파님)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하셨다. 요한복음 148-9절에서『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을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완전한 선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선이 내 이름 안에 담겨있는데, 그래서 나의 이름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고 있고, 자기가 이 이름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긍휼과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로마서 915절에서『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3321-23절『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을 지나가실 때, 모세를 반석 틈 사이에 숨기시고 손으로 모세를 덮어서 보호하시고 모세를 지나가신 후에 손을 거두어서 모세로 하나님영광의 잔재인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 대신 뒷모습을 통해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다.

요한계시록 217절에서『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름 안에서 아는 것은 영적으로 부부관계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영적 부부관계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된다. 신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나타낸 것이고,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대답을 거절했던 하나님이 출애굽사건을 통해 여호와(예수)란 이름을 알려주신 것은 그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기억하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를 이름으로도 알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모세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 모세의 지배자며 소유주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의 뒷모습, 하나님영광의 뒷그림자를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큰 축복과 은혜와 긍휼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깨닫고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예배인지 구분할 줄 모른다.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서 예배했으며,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만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만을 원했고, 하나님만으로 쉼을 얻었다. 다른 것을 축복이라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 없으면 싸움에서의 승리도, 전리품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으로 인해 그가 변한 것은 오직 예배였다. 여전히 사막이었고, 여전히 백성들은 쉽게 잊고 원망했다. 그래도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것만으로 모세는 만족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하이델베르그 문답 42-44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